난 지금까지 뮤지컬을 직접 보러 간 적이 없었다. 영상으로 오페라의 유령을 보고 학교 음악 수업 때 어떤 것인지를 배웠을 뿐 나와는 그리 관련이 없는 문화생활이라 생각했었다.
그러던 어느날 내 친구에게 자신이 뮤지컬을 하니 보러 오라는 말을 들었다.
친구가 속한 극단 리라(https://www.instagram.com/lyre_musicalteam/)에서 하는 공연이었는데 뮤지컬의 제목은 '말괄량이 길들이기'였다. 공연은 경성대에서 하였고 20일 21일의 공연 중 또 다른 뮤지컬에 관심이 있는 친구와 함께 21일 5시의 공연을 보러 갔다.
정말 내가 찜기에 들어간 냉동만두가 된 것인가 생각이 들 정도로 더웠던 하루였다. 과연 옷을 어떻게 입고 가야 할지 고민하다가 무난하게 검은 셔츠를 입었었는데 왜 하얀 셔츠가 인기가 있는지도 알 수 있던 더위였다. 그래도 경성대의 예소노 극장이라는 곳에 입장하니 에어컨이 빵빵해서 다행이었다.
뮤지컬의 내용은 대략 이러했다. 주인공 패트릭의 친구 카메론은 학교에서 인기가 많고 모범생인 비앙카를 짝사랑하고 있었다. 그런데 비앙카에게는 말을 안 듣는 마이웨이 락찔이 언니가 있었으니 그 이름은 캐서린이었다. 비앙카를 제외한 그들은 밴드 동아리 활동으로 묶여 있었으나 카메론은 캐서린을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아 했고 비앙카와 썸을 타려는 시도의 장애물로 취급했다. 그래서 패트릭에게 돈을 주고 캐서린과 사귀어서 자신의 일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도와달라고 한다. 그리고 여느 로맨스 시나리오답게 패트릭과 캐서린은 정말로 눈이 맞아 사귀게 된다.
여기까지가 대충 연극 전반부의 도입이었는데 꽤나 놀랐었다. 나는 이 뮤지컬이 이름만 듣고 동명의 희극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로맨스 코미디 물이라고만 예측하고 있었다. 그런데 웬걸, 전반부에 주인공 두 명이 벌써 사귀는 것이 아니겠는가. 사귀면서 트러블이 생기고 그것을 해결하는 것이 뮤지컬의 시나리오인가 싶었는데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극의 후반부에 다가갈수록 로맨스보다는 고등학생인 등장인물들의 현실적인 문제가 주가 되었다. 대학 입시가 다가온 상황에서 캐서린은 여전히 락을 좋아하고 락을 하려고 하였지만, 패트릭을 비롯한 밴드 동아리 친구들은 현실을 보고 공부를 택한다. 선생님과 가족과의 갈등 속에서 캐서린은 여전히 락을 계속하려 하지만 패트릭은 캐서린에게 대학에 들어가서도 밴드를 할 수 있다며 공부를 하자고 설득한다. 그러니까 마이웨이에 하고 싶은 것을 하며 살아왔던 캐서린이 현실적인 선택을 하도록 하는 상황을 말괄량이를 길들인다고 본 것이다.
결말은 궁금하다면 직접 찾아보라. 그런데 내용을 찾는다고 찾을 수 있는 걸까..? 더 말하면 스포일러가 될 것 같고 저작권적인 문제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이 시나리오가 극단 리라 버전의 유니크한 말괄량이 길들이기인지는 모르겠다. 뮤지컬을 좋아하는 지인이 뮤지컬은 절대 dvd와 같은 영상 굿즈를 판매하지 않는다고 분개해하던데 시나리오 자체도 방탈출 카페의 트릭처럼 말하면 안 되는 것일까? 잘 모르겠다.
뮤지컬은 배우들의 연기와 춤, 노래와 함께 공간, 시간적인 제약 속에서 시나리오가 합쳐진 현대적인 종합예술이라고 배웠다. 그 말 그대로 뮤지컬의 내용은 매우 풍성했다. 배우들의 연기도 꽤나 훌륭했고 배우들과 캐릭터들의 싱크로가 굉장히 잘 맞았다고 느꼈다. 그리고 무대라는 한정적인 공간에서 의자를 가지고 매우 다양한 상황을 어색하지 않게 표현하는 것이 대단했다.
노래 또한 다수의 곡이 나왔음에도 눈에 보이는 큰 실수 없이 박진감 넘쳤다고 생각한다. 특히 전반부 하이라이트로 보이는, 주인공 두 명이 사귀고 나서의 단체곡은 매우 인상 깊었다. 그래도 역시 다들 자신의 진짜 노래실력을 보여준 부분은 후반부쯤에 나오는 각자 자신들의 독창 파트였다고 생각한다. 거기다 뮤지컬은 노래만 부르는 것이 아닌 춤까지 추는데 멀티 태스킹이 정말 절망적으로 안 되는 나로서는 신기할 정도였다.
아쉬웠던 점은 자잘한 것들이 있었는데 먼저 극의 초반부에서 중반부까지는 솔직하게 배우들의 딕션이 잘 들리지 않았다. 연기파트도 약간 그랬는데 노래의 부분에서는 음만이 들릴뿐 소리 속에서 말의 구별이 잘 이루어지지 않아 내용을 이해하는데 어려움이 존재했다. 소리가 약간씩 찢어지는 느낌도 있었던 것을 보면 음향기기의 문제처럼도 보인다.
그리고 솔직하게 말하면 배우들의 기본기가 조금씩 아쉬웠다. 나는 연극을 서울에 살 때 딱 한번 보러 간 적이 있었다. 그 연극은 프로들이 하는 것인데다 연극과 뮤지컬을 일대일 대응으로 비교하는 것은 무리가 있지만, 그때 연극은 (심지어 가벼운 내용의 로맨스 코미디 성인 연극이었음에도) 시작하자말자 극에 들어간 느낌이 들 정도의 몰입이 몰려왔었다. 그러나 이번 뮤지컬은 프로라고 가정하였을 경우엔 배우들의 연기력과 가창력이 부족했다고 생각한다. (물론 난 돈을 내고 뮤지컬을 보러간 것은 아니다.) 선생님 역의 배우만이 내가 돈을 주고도 뮤지컬을 보러 갈 수 있겠구나라는 느낌을 주었는데 그래서 더욱 다른 배우들과의 퀄리티 차이가 비교되었다. 혹시 이 글을 읽는 누군가가 있을까 봐 밝히자면 배우들 모두 못한다는 느낌을 준 사람은 전혀 없었고 그저 취미활동이라고 치부할 수는 없는 퀄리티를 보여주었다.
극 중에서 인상 깊었던 부분은 선생님의 독창 파트와 빨간 나시를 입었던 친구 배우역의 연기였다. 선생님 또한 학생들의 경험을 해보았었고 그렇기에 학생들에게 밴드를 그만두고 현실을 보라고 하지만 자신의 역할에 회의감을 가지는 내용이 독창파트의 내용이었다. 사실 어떻게 보면 성장스토리에서 진부한 내용이지만 선생님의 연기력과 엄청난 노래 실력으로 나에게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이 되었다. 빨간 나시의 친구는 극에서 분위기 메이커 역할을 해주어 인상 깊었다. 루즈해질 수도 있을 때마다 적절하게 재미있는 장면을 만들어 주었다고 생각한다. 거기다 초반부 딕션이 잘 들리지 않았다고 했었는데 이 배역의 연기자분 말은 정확하게 잘 들렸다.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윗 구절은 내가 좋아하는 시 구절이다. 낙화(이형기, 1957)의 유명한 도입부인데 극 중에서 남주인공이 말괄량이를 길들이기 위하여 인용한 것이 기억난다.
혹시 낙화의 3연과 4연 구절이 무엇인지 아는가?
분분한 낙화.
결별이 이룩하는 축복에 싸여
지금은 가야 할 때.
무성한 녹음과 그리고
머지않아 열매 맺는
가을을 향하여
나의 청춘은 꽃답게 죽는다.
낙화라는 시를 연인과의 이별이 아닌 현재 내가 위치한 곳에서 벗어나 미래로 향하는 이의 고민을 다룬 시라고 해석하였을 때, 말괄량이 길들이기 뮤지컬에서 인물들의 선택에 대한 고민이 담긴 후반부와 매우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희극 말괄량이 길들이기보다도 더. 아마 시나리오 라이터가 이것까지 염두에 두고 시를 인용하지는 않았겠지만 나는 이 시를 생각하니 인물들의 생각을 이해하고 극의 메시지를 이해하는 것에 도움이 되었다.
말괄량이 길들이기에서는 무조건 현실을 택하고 공부를 하는 것이 맞다고는 주장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판에 박힌 '무조건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이 옳아!'라는 주장도 하지 않는다. 여러 가지 인물들을 보여주며 이 사람은 이러한 상황에서 이런 선택을 하였다고 보여준다. 우리가 사는 삶도 어쩌면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든다. 지나고 보면 갈림길에서 그때마다의 옳았던 선택과 틀렸던 선택이 있었을 것이다. 지금 우리가 서있는 곳에서 어떤 길을 택해야 할지도 고민일 것이다. 그 고민은 캐서린처럼 자신의 신념과 현실의 압박과의 갈등일 수도 있고 오늘 점심 짜장면 먹을까 짬뽕 먹을까의 단순한 내용일 수도 있다. 그래도 우리는 언젠가 떨어지는 꽃처럼 이별을 해야 하기에, 가야 할 길을 치열하게 고민하고, 내가 걸어갈 길을 위하여 지금 후회 없을 만큼 열심히 꽃 피워야 하는 것 아닐까.
*글에 있는 사진들은 저작권은 극단 리라에 있으며 출처는 리라의 인스타그램입니다.
https://www.instagram.com/lyre_musicalteam/
**좋은 뮤지컬을 관람할 기회를 준 친구와 극단 리라에 감사를 전합니다.